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모든 구원은 양심 구원이다
    성경 이야기 2023. 6. 25. 15:33

     

     

    킹 제임스 세대주의자들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By grace through faith'를 강조한다. By grace, 은혜에 의해. Through faith of Jesus, 예수님의 믿음으로 혹은 예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그러면서 '행위'에 대한 말씀들은 오직 유대인에게 대환난을 대비해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우리는 교회시대 이방인 교회에게도 '행위'가 요구됨을 보았다. 신약 시대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편지에서 특정한 행위에 따라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음을 보았다. 아무리 뱀처럼 몸을 비틀어도 차마 일곱 교회를 유대인들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킹 제임스 세대주의가 널리 퍼뜨린 또하나의 패악이 있으니 그건 '양심에 대한 무시'이다. '은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좋다. 구원 받는 시점에서의 죄사함과 구원은 오롯이 은혜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행위에는 구원 근처도 갈 힘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 때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있듯이 구원에 있어서도 은혜와 믿음 외에 필수적인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양심'이다.

     

    세대주의에서는 복음이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에, 혹은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소위 '미전도 족속'의 경우에만 '양심 구원'이 적용되고 복음이 주어지면 양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오로지 복음을 '믿고' '은혜'만 받으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친다. 나는 이런 교리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이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그것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 디모데전서 1:19 -

     

    맨위 그림에 적힌 디모데전서 119 말씀이다. 믿음만 붙들다가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오직 믿음과 선한 양심을 함께 붙들 때만이 난파선 신세를 면할 수 있다고 떡하니 적혀 있다. 이럴진대 건물교회 교단들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반쪽짜리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교인들의 파선이기 때문이다. 은혜와 믿음만 강조하고 선한 양심을 똑같이 강조하지 않으면 알아서 파선한다. 선한 양심이 없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다. 그게 문자 그대로의 성경 말씀이다.

     
     
     
     
     

    영문 킹 제임스 성경에 Conscience(양심)은 29회 언급되며 한글 킹 제임스 흠정역에는 의역 문제로 28회 등장한다. 한번 쭉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10:29

    내가 말하는 양심은 네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이니라. 어찌하여 내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디모데전서 3:9

    순수한 양심 속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0:25

    무엇이든지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디모데전서 4: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로마서 13:5

    그러므로 너희는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반드시 복종해야 하느니라.

     

    디모데전서 1:5

    이제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그것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고린도전서 8:12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히브리서 13:18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하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로마서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내 양심도 [성령]님 안에서 나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사도행전 24:16

    이 소망 속에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양심에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힘쓰나이다.

     

    로마서 2:15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히브리서 9:9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므로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기는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0:27

    믿지 않는 자들 중에서 누가 너희를 잔치에 초대하여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디도서 1:15

    순수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순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과 양심마저도 더럽혀져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1:3

    내가 밤낮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너를 기억하므로 내 선조들 때부터 순수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히브리서 10:22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고린도전서 8:10

    지식이 있는 네가 우상의 전에서 음식 앞에 앉은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약한 그 사람의 양심이 담대하게 되어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을 먹게 되지 아니하겠느냐?

     

    베드로전서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것은 너희를 가리켜 악을 행하는 자라 비방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8:9

    그들이 그것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나이가 가장 많은 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매 오직 예수님만 남았고 그 여자는 한가운데 서 있더라.

     

    사도행전 23:1

    바울이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노라, 하거늘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고린도전서 10:28

    그러나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이르되, 이것은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라, 하거든 그것을 알게 한 사람과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땅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5:11

    그런즉 우리가 [주]의 두려움을 알므로 사람들을 설득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께 밝히 드러났고 또 너희 양심에도 밝히 드러난 줄로 내가 확신하노라.

     

    베드로전서 3:21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

     

    고린도후서 1:12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

     

    고린도후서 4:2

    오히려 감추어 둔 정직하지 못한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걷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

     
     
     

    읽으면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생각보다 훨씬 성경은 양심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모두 신약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에 비해 건물교회에서는 양심에 대해 거의 아무런 비중도 두지 않는다는 점도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부터 신비로운 양심이란 존재의 비밀에 대해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사랑(Charity)'은 선한 양심이 없으면 나올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제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 디모데전서 1:5 -

     

    사랑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온다. 만약 순수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만 있다면? 사랑이 나올 수 없다. 나는 마음도 순수한 편이고 믿음도 굳건한데 왜 이렇게 사랑이 부족하지?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건 선한 양심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양심은 우리의 증인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내 양심도 [성령]님 안에서 나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 로마서 9:1 -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 로마서 2:15 -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

    - 고린도후서 1:12 -

     

    성령님의 증인 되심은 많은 성도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성령님에게 우리에 대해 증언하는 존재가 양심이라는 건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치도 않는다. 우리 안의 양심은 성령님에게 증언할 수 있는 증인으로 채택된 존재이다.

     
     
     
     

    양심은 또한 진실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 디모데전서 4:2 -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하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 히브리서 13:18 -

     

    위선자들과 거짓말 하는 자들은 양심을 인두로 지진 자들이고, 모든 일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선한 양심을 가진 줄 확신한다고 하였다. 정직이란 숨김이 없이 모든 것을 떳떳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을 수 있음이다. 24시간 모든 언행을 전 세계에 영상으로 생중계해도 거리낌이 없는 삶을 매순간 추구하는 사람은 선한 양심을 가진 줄로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의 믿음은 아무리 신박한 성경 강의를 하고 다녀도 그냥 하나의 난파선일 뿐이다.

     
     
     
     

    또한 양심은 믿음의 신비가 간직되는 곳이다.

     

    "순수한 양심 속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할지니라."

    - 디모데전서 3:9 -

     

    믿음의 신비를 순수한 양심 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술사나 무당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이 없이는 믿음의 신비도 난파선의 무게만 더해줄 뿐이다.

     
     
     
     

    선한 양심은 또한 우리 모두의 강력한 방어수단이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것은 너희를 가리켜 악을 행하는 자라 비방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3:16 -

    "바울이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르되, 사람들아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노라, 하거늘"

    - 사도행전 23:1 -

     

    예수님은 선한 양심을 가진 자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 Maybe not today, not tomorrow, but someday. 꼭 오늘이나 내일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부끄러움으로 결말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갖는 일은 그 자체로 훌륭한 방패가 된다. 바울 사도의 저 한 마디.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노라. 이 한 마디면 바울의 방어는 이미 끝났다.

     
     
     
     

    또한 양심은 그 자체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시대의 분수령이다.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므로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기는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 히브리서 9:9 -

     

    힘들게 성막을 짓고 온갖 율법을 갖춰 행한 유대민족의 제사는 단지 모형이었을 뿐이어서 양심에 관한 한 섬기는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

    - 히브리서 9:14 -

     

    그리스도의 피로인해 비로소 우리의 양심은 깨끗해질 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행위로는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다. 앞서 선한 양심을 갖는다는 건 모든 일에 정직하기로 마음먹는 일이라 하였다. 마음 중심에서 매분매초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면 선한 양심의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한 양심도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가 뿌려짐으로 인해 우리의 양심은 깨끗하게 될 길이 열린 것이다.

     
     
     
     
     

    또한, 선한 양심이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

    - 고린도후서 1:12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활함에 있어 단순함과 진실함과 은혜로 서로를 향하여 생활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진짜로 그렇게 생활했는지 증언을 해주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양심이다. 양심이 그렇게 증언해주지 않으면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제 바울이 고난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라!' 하고 말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심은 구원의 필수 요소이다.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

    - 베드로전서 3:21 -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노아의 홍수는 물로 말미암은 심판이었으나 노아에게는 구원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모형인 침례는 여전히 우리를 구원한다. 그렇다. 침례는 홍수의 모형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 침례는 '구원한다'라고 분명히 써 있다. 침례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면 안 된다. 다만 침례란 물로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침례의 본질은 물에 잠깐 잠기는 데에 있지 않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며, 그럴 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물에 잠기는 행위는 생략 가능하지만 선한 양심으로 응답하는 일은 생략 불가능하다. 그것이 진짜 침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선한 양심으로 응답을 하려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신다. 그리고 그 가책에 선한 양심으로 응답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며 침례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응답을 하면 은혜로서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 그때 예수님의 믿음 또한 선물로 주어진다.

     

    순서로 보면 양심의 가책, 선한 양심으로 응답, 구원의 순이다. '선한 양심으로 응답'이 생략된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있다고 말한다면 성경에 대한 정면도전에 해당한다. 이것이 신약시대 소위 '은혜구원'의 핵심인 것이다. 이럴진대 건물교회에서는 뻐꾸기처럼 '믿음', '은혜'만 주문처럼 외고 있으니 문제다. 킹 제임스 주의자들은 소위 '양심구원'이 구약시대 혹은 미전도 족속에만 해당하는 얘기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신약시대의 구원이야말로 양심구원인 것이다. 오히려 구약 시대의 구원이야말로 표적과 제사와 계시 등 행위/사건 중심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 신약시대에 와서는 누구나 선한 양심만 있다면 행위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양심'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만 나오는데, 나는 그 이유가 구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피뿌리심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깨끗한 양심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구약 시대엔 양심이란 것은 있으되 양심의 가책이 지금처럼 분명하게 주어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한다. 양심의 가책 - 선한 양심으로 응답 순서로 주어지는 '은혜구원'이 십자가 사건으로 제사와 율법이 철폐(완성)된 이후의 구원방식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해당하는 양심의 가책도 그때쯤 새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나의 현재 이론이다. 만약 구약시대에도 똑같은 부르심과 선한 양심의 응답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도 은혜구원이 주어져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있을까. 대체 양심이란 무엇일까. 양심의 비밀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라. 그분께서 아침 일찍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나아오매 그분께서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녀를 한가운데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나이다. 이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러한 자를 돌로 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거니와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니라. 그들이 그분을 시험하며 이렇게 말한 것은 그분을 고소하려 함이더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신 듯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 이에 그들이 계속해서 그분께 물으니 그분께서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땅에 쓰시니라. 그들이 그것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나이가 가장 많은 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매 오직 예수님만 남았고 그 여자는 한가운데 서 있더라. 예수님께서 일어나사 그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그녀가 이르되, 주여, 아무도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8:1-11 -

     

    요한복음 8장은 은혜구원의 정수를 모두 담고 있다. 또한 '양심의 가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 율법 대로 공의롭게 죽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죄 때문에 악한 영들과 사탄에게 참소 당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간음한 자들이고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귀 같은 바리새인들이 참소를 하는 와중에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 하신다. 그럼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계속해서 물으니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하신다. 그러자 군중들은 나이 많은 자로부터 하나도 빠짐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하나씩 자리를 빠져나간다.

     

    양심의 가책. Conviction of conscience. 나는 이 순간이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과 같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된 순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구절들에 주목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신 듯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

    "그분께서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땅에 쓰시니라."

     

    땅은 흙이고 흙은 인간이다. 인간 안에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무얼 쓰셨을까? 나는 첫 번째가 마음에 새겨진 율법으로서의 양심을 쓰신 것이고, 두 번째가 양심의 가책을 쓰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첫 번째로 땅에 쓰고 계실 때 군중은 율법을 내세우며 예수님께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일 것을 참소한다. 자신들도 똑같은 창녀임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죄만 참소한다. 남에게 걸리지 않은 자신의 죄는 아랑곳 않고 걸린 사람의 죄만 양심도 없이 규탄하는 것이다. 이때 에수님이 쓰는 일을 멈추고 일어나셔서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는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신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시기 시작한다. 그러자 기적처럼 참소하던 그 사악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둘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리를 피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렇다. 우리들 안의 양심은 예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써주신 그분의 율법이다. 그리고 양심을 어겼을 때 들려오는 양심의 가책은 그분이 우리에게 손가락으로 쓰신 러브레터인 것이다. 악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미워한다. 견딜 수 없어하며 그 가책을 잊기 위해서는 마약이든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한다. 그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은 사실상 선한 양심으로 응답하지 않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잊어보려는 백만가지 시도에 불과하다. 특히 그중 '종교행위'가 가장 효과적인 양심의 가책 마취제이다. 주일성수하는 건물교회 교인 대부분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찾아오는 양심의 가책에 선한 양심으로 응답하는 대신 종교행위를 택한 사람들이다.

     

    반면, 예수님의 자녀들은 양심의 가책을 기뻐한다. 나에게 오라는, 나와 함께 영원을 함께 하자는 그분의 러브레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러브레터에 눈물로 화답한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침례고, 은혜고, 구원이다.

     

     

     

     

     

     

    출처: 스카이트리 매거진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