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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폭'을 규탄한다고?
    인생 이야기 2021. 8. 8. 13:20

     

     

     

    학폭에 대한 관심이 식을 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슬픈 문제’에 대해서 쉽게 입을 열기가 힘들다고 느꼈다. 그건 명확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즉 ‘착한놈’과 ‘나쁜놈’으로 나누어서 나쁜놈들을 쓸어버리면 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선 우리 아이들 모두가 피해자인 것이 확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느때처럼 언론의 낚시에 낚여서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학폭이 미운가 아니면 학폭 가해자가 미운가’ 묻고 싶다. 학폭이라는 비극 자체를 미워한다면 그 근본원인을 파고들어가 뿌리를 뽑는 노력에 최대한 리소스를 집중하고 싶어할 것이고, 학폭 가해자를 미워한다면 학폭의 근본원인 같은 것은 나중 문제고 일단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을 해야만 속이 시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다만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므로 응징 자체가 정의로워야 한다. 가해자들 중에서 유명인사나 부자, 권력자만을 응징해서는 정의라고 할 수 없다. 과거 학폭 가해자가 현재 아무리 불쌍한 모습으로 살고있다 하더라도 모두 찾아내서 똑같이 응징해야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쟤가 잘 나가는 꼴은 못 보겠어’라는 마음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피해자도, 구경꾼들도 모두 분노의 감정을 잠시 유보하지 않으면 ‘공정’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물론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  

     

     

     

    가장 큰 함정은 감정에 휘둘려 아이들의 눈 앞에서 ‘법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일이다. 박근혜 탄핵때 이 나라는 이미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증거주의’를 버렸고, 그 이후로 ‘정황’이나 ‘증언’만으로 죄가 성립하는 분야가 늘고있다. ‘미투’의 경우에는 그래도 비교적 최근의 사건을 여러명의 피해자가 상세히 증언을 했었고 문자메세지나 모텔 폐쇄회로등 증거가 제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증언만으로 죄가 성립한다는 점을 악용해서 ‘무고한 피고’를 자살로 내모는 일이 여러건 있었다. 학폭의 경우 미투보다 몇 단계 진화해서, 기본적으로 수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 증언만으로 유죄추정을 하는가 하면, 법에 명시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생업에서 물러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초법적인 처벌로 발전하고 있다. 증인 몇 명과 언론기사 몇 줄만 있으면 누구라도 정의의 이름으로 매장시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증인을 살 수 있는 돈의 힘과 대중의 이목을 지배하는 언론의 힘은 이제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학폭 다음으로 미디어는 어떤 이슈를 들이밀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악마는 누가 지목될 것이고 어떤 초법적인 처벌을 받게 될 것인가. 이 패턴에 끝은 있을까. 모든 사람의 ‘천부인권’이 사라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헌법에서 ‘신성한 권리’ 즉 ‘신’이 사라지면 인민의 ‘모든 권리’는 인간, 즉 국회의원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또다른 함정은 ‘이럴바엔 가상현실이 낫다’라는 결론이다. 비대면 수업을 하면 학폭이야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와 함께 많은 것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선생님들은 AI로 대체가 될 것이다. 온라인상에서는 인간도, AI도 모두 동등한 ‘얼굴’일 뿐이다.  

     

     

     

    ‘학폭’이나 ‘따돌림’같은 미성년 또래집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상을 반영한다.  

     

     

     

    사실 한 아이가 ‘반사회적 인격’ 즉 문제아적 경향을 갖게될 것인가는 만4세경에 거의 결정이 된다. 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걷기와 말하기를 배운다. 그런 뒤 아이는 부모가 아닌 가족, 친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고 3~5세 쯤에는 처음으로 가족 구성원 밖의 사람들과 특히 또래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아이는 평생 반사회적 인격을 지니게 된다. 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아 안정감을 지녀야 하며, 남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고, 대화와 놀이를 통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을 줄 알아야 한다. 이기적인 태도와 거짓말에 대해서는 확실한 처벌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기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의 매’가 아이로 하여금 사랑받는 아이가 되도록 인도해 줄 수 있는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과 ‘사랑의 매’ 중에서 어느 하나만 주거나 어느쪽도 제공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아이는 사회화가 힘든 인격의 소유자가 된다. 또한, 아이는 부모의 가치관을 무언의 언어로 학습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아이가 원하는 일은 없다. 아이는 부모들이 욕망하는 가장 비밀스런 것들을 귀신같이 알고 욕망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아이의 인생은 부모의 자화상이라고 할 만 하다. 

     

     

     

    이렇게 ‘부모의 자화상들’이 모인 또래집단은 어떤면에서 어른들의 그것보다 더 정글에 가깝다. 가정에도, 사회에도 속하지 않는 곳에서 법에 구속받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사춘기를 거치게 되면서 아이들의 정글에는 명확한 계급이 생긴다. 소위 ‘잘 나가는’부모를 뒀거나 ‘앞으로 커서 잘 나갈 것 같은’아이들이 계급의 상위권에 포진한다. 돈 많은 아이, 힘 센 아이, 전교1등, 이쁘고 잘생긴 아이 등이 힘을 갖는다. 부자, 운동선수, 판검사, 연예인 등에 열광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된다. 솔직한 아이, 책임감이 강한 아이, 가진 것을 나누는 아이 등이 힘을 갖게되는 일은 없다. 그 아이가 반장이나 전교1등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원인 아이나 ‘SH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 말이 어눌한 아이, 왜소한 아이 등은 스스로 기를 펴지 못하고 그 결과 학폭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학폭 피해자가 된 아이들이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힘있는 아이들에게 기가 눌려 생활하는 아이들은 생각한다.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돈을 벌어서, 힘을 길러서 이 치욕을 씻고 말겠어, 라고. 그렇게 순한 얼굴 뒤에 힘에 대한 갈망과 앙심을 감춘 위선자로 자라난다. 

     

     

     

    그럼 힘을 갖고 살았던 아이들의 인생은 행복할까? 더 많이 가져야만 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하는 인생들이 되어 그 욕심을 위해서라면 몸도 영혼도 모두 팔아버릴 그 아이들이 가해자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권력지향적이고 금전지향적이고 외모지향적인 주니어 유물론자들이 가득한 정글은 누가 만들었나. 누구겠나, 부모들과 어른들이지. 학폭 뉴스에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한편으로는 ‘돈 벌어야지’, ‘이뻐야지’, ‘잘생겨야지’, ‘성공해야지’, ‘우월해져야지’라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 영혼이라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믿냐는, 생활이 먼저라는 사람들. 신이 부여한 천부인권은 누리지만 신이 대체 어디 있냐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모두가 범인이다. 어른들이 온몸으로 유물론자의 줄세우기식 삶을 살면서 대체 어떻게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그와 다르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가 해고당하고 매장당해야 한다면 그런 어른들이 먼저다. 그런 사람들이 국가와 기업과 가정을 이끄는한 학폭이 없어지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아직 철없는 초, 중, 고, 대학생들은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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