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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거지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인생 이야기 2021. 10. 26. 13:47
    관련글:
    여자의 젊음: https://food4soul.tistory.com/16

    영화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한 여자밖에 모르는 사랑꾼 개츠비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해가면서까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있다. 데이지에게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반면 데이지는 과거가 무슨 상관이냐, 둘 다 사랑했다, 이제부터 너랑 살면 되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난리냐, 라는 입장이다. 그 와중에 타이밍 좋게 설거지 담당 능력남 톰 뷰캐넌은 개츠비에게 천박한 도태남이라며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면서 데이지에게 ‘난 바람은 피우지만 언제나 돌아가지 않냐’면서 계속 살자고 한다. 다들 그러고들 산다, 결혼은 현실 아니냐,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아마 많은 여성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개츠비를 잘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매불망 그리던 데이지를 되찾았는데 훌쩍 같이 떠나면 그만이지 왜 과거에 잠깐 사랑했던 남자를 굳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게 시키는지—그것도 마치 거기에 모든 게 걸려 있다는 듯이—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무리는 아니다. 데이지도 이해하지 못 했으니까. 남자들이 왜 그렇게 여자의 과거에 집착하는지.

     

     

     

    하지만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어떤 자기방어기제에 의해 뇌가 알아서 이해의 연결고리를 끊어두기라도 한 것일까. 왜 결혼정보회사에서 여성의 프로필에 워킹홀리데이나 유학 경험이 있으면 감점을 시키는지, 왜 여자들에게는 ‘모쏠’이 아니라 ‘걸레’가 가장 심한 욕인지, 왜 개츠비는 데이지가 같이 살겠다고 했음에도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말할 것을 강요했는지, 정말로 가슴에 손을 얹고 절대 모르겠다고 할 수 있는가.

     

     

     

    다음은 더 큰 성공을 위해 힘있는 남자들에게 몸과 영혼을 팔아버린 어떤 상류사회 여자가 쓴 시다. (세상에 발표된 적이 없는 시. 영어로 작성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소개한다.)

     

    “매일 나는 아픈 가슴으로 잠에서 깨어나, 지옥처럼 아픈,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죽었고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웃는 얼굴을 해, 그러는 편이 훨씬 수월하거든.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어.

     

    인생은 이제 나에게 하나의 티백같아, 잠길수록 점점 더 써지기만 하는. 그래서 대신 나는 내게 주어진 즐거움을 세어보려고 해. 집에 가고 싶어.”

     

     

     

    스스로의 욕심에, 그리고 누군가의 속임수에 속아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망쳐버렸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아파하는 시다. 얼마나 생각할수록 쓰디쓴 기억이기에 모두 외면하고 즐거운 것들만 세어보려 하는 것일까. 그녀는 어디에 있길래 집이 그리운 것일까. 그녀는 앞으로도 쓰디쓴 티백같은 인생과 오직 즐거움만을 세어보는 인생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시계추의 진폭은 점점 커져갈 것이고 아마도 추가 부러지기 전까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시계추를 자기 손으로 부러뜨려서라도 모든 것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멍든 가슴을 지닌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악순환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나려면 좀더 자기 자신을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SNS에 전체공개로 서술할 수 없는 일은 모두 죄로 생각하고 뉘우쳐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공개 불가능한 비밀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버려야 할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 그럼 그 과정에서 남편이 아닌 사람과 했던 과거의 모든 성관계가 죄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어떤 남편이 과거 모든 성관계를 죄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기 자신이 구역질나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하는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여자가 그렇게 나오면 남자의 지나간 성관계도 모두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을 범한 뉘우쳐야 할 죄가 되어버리는데 말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모든 과거를 남편에게 말해보기 바란다. 몇 살 때 어디서 누구와 몇 분간 어떤 체위로 어떻게 첫경험을 했는지, 얼마나 다양한 애무와 체위를 해봤는지, 현재까지 총 몇 명과 몇 회의 성관계를 했는지, 누가 가장 좋았었는지, 어디서 했던 섹스가 가장 스릴있었는지, 오르가즘은 언제 처음 느꼈는지, 누구랑 가장 많이 느꼈는지, 과거 남자친구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했었는지, 질내사정은 몇 번 해봤는지 등등 상세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말해보기 바란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렇게 증명해보기 바란다. 아마 한 십 년 후면 머릿속 기억을 비디오로 재생시키는 기술이 나올지 모르니 사이좋게 부부 침실에서 기억을 함께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죄가 아닌 이쁜 추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그렇게 해보길.

     

     

     

    사실 성관계라는 건 결혼이라는 우산 아래서 관리되고 제한되어야만 하는 극도로 개인적이고 친밀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신의 선물과 같은 것이다.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는. (데이트, 이별, 치정범죄는 모두 섹스에서 기인한다.) 섹스가 결혼이라는 우산 밖으로 나가버리는 순간 남는 것은 쾌락뿐이게 되고 그 결과는 항상 비극이다. 나는 그걸 2년 전에야 깨달았다. 누구도 그렇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마저도 성인 되기 전까지 절대 하지 말라고만 하셨고, 대중문화와 친구들은 완전히 큰일날 소리만 해댈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모노가미 즉 일부일처제 이외의 형태로는 절대로 원만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꾸릴 수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몇몇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재된 <설거지론> 관련 인기글들을 살펴보면 주로 논쟁거리가 되는 포인트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이 가능해 보인다.

     

    1. 여자가 20대 초반의 가장 찬란한 날들을 얼굴도 모르고 몇 명인지도 모르는(하지만 결혼식 단체사진에는 있는) 남자들과 때론 불같이, 때론 알콩달콩 ‘이쁜 추억’ 만들며 보냈다는 점

    2.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이쁜 추억들’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숨기거나 거짓말을 한다는 점

    3. 20대가 다 지나가고서야 이제부터는 진지해지기로 했다며 갑자기 프리섹스모드에서 진지한섹스모드로 전환한다는 점. 그리고는 진지한 섹스의 대가로 20대때는 소주 한 병에 안주 한 그릇에 섹스하던 여자가 온갖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는 점

     

    그런 <설거지론>을 접하고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놀란 이유는 좀 논다는 남자들은 누구나 당연히 알고있던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남자들이 많아서였고, 가슴이 아팠던 이유는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던 통계를 실제로 확인하게 되어서였다.

     

     

     

    유전자 분석 통계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남성의 50% 미만이 후손을 남긴 반면 여성은 80% 이상이 후손을 남겼으며, 자손을 남긴 사람들의 경우 평균 자녀수가 남성이 2.5명, 여성이 1.5명쯤 된다고 한다. 즉, 상위권에 드는 남자들은 두 명 이상의 여자들에게서 두 명 이상의 자손을 남긴 반면, 하위권 남자들은 단 한명의 여자에게서 단 한 명의 자손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번에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대신 트럼프처럼 10년에 한 번씩 부인을 교체해가면서 대여섯명 이상의 자손을 남기는 남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애비없이 자라는 아이들과 도태되는 남성들이 늘어났고 세상은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중이다.

     

     

     

    한 디씨 주갤 이용자는 <설거지론> 관련 게시물에서 ‘현대판 초야권’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인즉슨 자원을 가진 상위계층 남자들이 자신들만의 ‘환상의 성’을 마치 TV드라마처럼 갖춰놓고 매년 스무살이 되어 쏟아져 들어오는 여자들을 골라서 ‘환상의 성’에 초대해 드라마 주인공이 된듯한 느낌을 선사하면서 ‘이쁜추억’이라는 걸 제공하는 대신 초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환상의 성에서 가장 예쁜 시절을 다 보낸 여자들이 다른 어린 여자들에게 밀려 성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이미 허영 가득해진 눈높이를 맞춰줄 남자를 만날 수 없어서 평생 이쁜 추억만 회상하면서 아직 유혹가능한 설거지남에게 의탁해 신도시에서 살아가거나, 아니면 결혼을 하지 못하고 늙어간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이론은 대부분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대판 초야권 (출처: 디씨인사이드 주식갤러리)

     

     

    그런데 사람들이 한 가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저 ‘환상의 성’에 살면서 매년 20대 초반의 여자들을 바꿔가며 만나는 남자들을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은 부러워할텐데, 그 한가운데에서의 삶을 경험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어쩌면 가장 허망한 삶을 사는 건 스스로 환상의 성을 만든 그 남자들이란 것이다. 여자들은 나이가 차면 대부분 자의반 타의반 그 세계에서 나간다. 그게 과연 불행일까? 어쩌면 환상의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 더 불행해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행을 느끼지 않고 행복을 느낀다는 건 일종의 저주는 아닐까?

     

     

     

    패티쉬라는 말이 있다. 보통 변태스러우면서 야시시한 무엇을 떠올리는데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집착

    2.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것

    3. 주물, 숭배의 대상

     

     

     

    요즘 흔히 쓰는 무슨무슨 ‘성애자’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집착과 쾌감의 단계를 넘어 종교적인 숭배의 의미까지 담겨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육신(쾌감)에서 시작해서 영혼(숭배)까지 잠식해버리는 무엇이라는 말인데, 사전에 적혀있지는 않지만 패티쉬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정해진 목적의 범위와 정도를 벗어난 쾌감이라는 것이다.

     

     

     

    가령 발이나 겨드랑이 같은 부위에서 섹스보다 더한 쾌감을 찾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발에서 어떤 매력을 느낄 수는 있지만 발의 용도는 원래 성행위를 위한 게 아니다. 변태라고 할 수 있다. 범위를 확장해서 적용해보면 동성애도 일종의 페티쉬이고, 번지수를 잘못 찾은 근친상간이나 수간도 패티쉬에 속하고, 번지수가 뒤엉킨 난교나 스와핑도 페티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우산 밖의 성행위에서 느끼는 쾌락도 패티쉬다.

     

     

     

    패티쉬의 특징은 정도를 벗어났다는 것인데, 정도를 벗어나면 당연히 이상한 샛길로 가게 된다. 어디로 가는지 오락가락 하다가 점점 더 요상한 길로 접어든다. 문제는 스스로 멈출 수 없게 중독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지고 패티쉬의 종류를 넘나들기도 한다. 일례로, 불륜을 좋아하는 것도 일종의 패티쉬라서 유부녀나 유부남이 싱글인 이성보다 훨씬 쾌감이 든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패티쉬는 정도를 벗어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일종의 우상숭배행위로서 한번 금단의 잊지 못할 맛을 보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점점 더 원치않는 상상의 올무에 사로잡히게 되는 신의 저주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환상의 성에 사는 사람들도 패티쉬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다. 패티쉬에 빠진 사람들은 정상인이고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면서 살아갈 수는 있지만, 진짜로 멀쩡하고 양심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머릿속에 원치않는 상상이 계속해서 떠다니고 우울증과 불안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신증은 양심이 존재를 부정할 때 오는 형벌이다.)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 이상의 패티쉬와 우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모두가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부정해야 한다. 부부는 상대방을 영혼의 동반자로 보지 않고 쾌락의 대상으로 보거나 경제적, 사회적 도구로 봤던 일이 있다면 진심으로 뉘우쳐야만 한다. (능력 되는 찐따들 특히 여자 외모보다 생각과 교양 등 정신적, 인간적 매력을 살피는 안목을 키우길 바란다. 연애경험 없이 정 외모 욕심낼거면 흥신소는 필수) 과거의 모든 성관계도 죄로 규정하고 뉘우쳐야 한다. 이런 근본적인 것들이 안 되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과거가 역겹게 느껴질 정도로 뉘우쳐야만 사람이 변한다. 그래야만 <설거지론>에서 언급된 ‘퐁퐁단’이나 ‘짜장면그릇’에서 멀어질 수 있다. 부부가 서로, 당신은 앞으로 이렇게 해줘, 나는 이렇게 할테니, 이런 거 각서 쓰고 백년을 해봐야 사람은 절대로 안 변한다. 포물선을 그리며 오르락 내리락 할 뿐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나만 변하고 상대방은 그대로라면? 상대방이 바람을 피운다면 이혼이 맞고 그게 아니라면 인내를 갖는 편이 낫다.

     

     

     

    미혼남성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도태남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절대로 세상이나 타인에게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지금이 가장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 앙심을 품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바닥 없는 구덩이를 경험하게 될 뿐이다. 남자는 숭고한 목표가 없으면 죽은 거나 매한가지다. 숭고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도움이 될 작은 행동들을 해나갈 때, 매일 어제보다 1% 나은 사람이 되어갈 때에만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의미있는 인생을 살면 자연히 언젠가 상위권 안에 들 날이 올 가능성이 높다. 상위 1%의 영역인 환상의 성?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좋다. 거긴 패티쉬의 세상이고 중독자들의 세상이다.

     

     

     

     

    P.S.

     

    결혼이 농경사회로 넘어오면서 지배의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며 산업화시대까지는 적절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고려시대나 신라시대의 자유분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문화를 언급하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조상인 고조선 유목민의 ‘집단 난교축제’ 방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미래사회의 성문화와 오버랩된다. 마치 그 방향으로 소셜 엔지니어링을 하는 세력이 존재하기라도 하듯이.)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은 자기 아내나 딸이 온동네 남자들과 집단 난교하는 광경을 보여줘야 정신을 차린다. 마치 ‘선악은 없다, 모든 것이 자연의 적자생존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묶어놓고 손톱 두어개만 빼면 ‘이 악마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신앙고백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왜 자신들이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오픈된 성문화’로의 전환을 자기 가족들부터 시작하지 못하나? 그건 그들이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하거나 양심이 고장났기 때문이다. 양심이 고장나서 ‘나만 아니면 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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