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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무조건 천국에 가나요?카테고리 없음 2025. 2. 17. 15:10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이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적지 않은 독자분들이 질문해주셨던 주제다. 인간에게 아기란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나 자신보다 중요한 유일한 존재'라는 말이 있듯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가장 불행하게 해주기도 하는 존재. 에덴동산에서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을 더하신 것도 아버지에게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에 아버지의 슬픔을 우리도 느껴보도록 하신 안배 중 하나이리라.
일단 아주 어린 아이들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건 성경을 통해 어느정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구절들을 함께 보자.
마19:13 그때에 사람들이 그분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실 것을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마19:14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하시고
하늘의 왕국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비유의 원천인 어린아이들이 지옥에 갈 리는 없어 보인다.
마18:2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회심한(뉘우친)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되고, 그래야 하늘의 왕국에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들이 '자기를 낮추는 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어린아이들이 자기를 낮춘다기보다는 아직 자존심을 부릴 정도로 자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만 어쨌든 자존심(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인 것은 맞다. 우리는 자라면서 머리가 커지면 어느 순간부터 늘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안달을 하기 시작한다. 자기를 높이려고 온갖 피나는 노력을 하고, 말과 표정과 제스추어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그게 자존심의 징표이자 질투의 징표다.
그러면 몇 살까지가 '어린아이'에 해당할까? 12살? 7살?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옷을 벗었을 때 부끄러워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기점, 사춘기의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에덴동산의 일을 생각하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개인마다 그 시점도 다르리라.
마18: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
"Take heed that ye despise not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say unto you, That in heaven their angels do always behold the face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Matthew 18:10 KJV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왜냐면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각각의 수호천사가 배정되어 있는 것일까? 늘 지켜보며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만약 그 아이가 자라면서 악을 선택하더라도 돌이키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수호천사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한때 아이였으므로 우리들 모두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말이 된다. 정말 그렇다면 끝내 선한 양심으로 아버지께 응답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수호천사는 참 슬프겠다. 반대로 뉘우치고(선한 양심으로 응답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수호천사는 얼마나 기쁠까. 한 명이 돌아올 때마다 하늘에서 잔치가 열리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또한 '돌아오다'라는 말도 여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자존심을 모르는 아이였을 때는 누구나 하늘에 속했다가 세상으로 나아가며 유혹을 받아 악한 본성으로 살고 그중 극소수가 회심하여 다시 돌아오는 구조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예19:4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멀리하였으며 그것 안에서 자기들과 자기 조상들과 유다의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였고 무죄한 자들의 피로 이곳을 채웠느니라.
여기서 '무죄한 자들의 피'란 바알(바포맷)에게 어린아이를 바치던 당시 풍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어린아이(주로 아기들이지만)는 '죄 없는 자'이고 그럼 당연히 지옥에는 갈 수 없다.
사무엘하12:22 그가 이르되,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내가 말하기를,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리요? 하였기 때문이거니와
사무엘하12:23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신이 아이에게 갈 것을 확신했다. 그곳이 지옥은 아닐 것이다. 간절히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아기가 죽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굳건한 믿음이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리요? 하며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지만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순종하는 모습이 귀감이 된다.
여기까지 충분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이들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도래해 여러가지 자기 안의 욕심들로 인한 유혹들을 받기 시작한 아이의 경우는 어떠할까. 안그래도 얼마전까지 한참 '촉법소년'의 범죄가 이슈였고, 초등학생 아이들의 범죄가 때론 어른의 범죄보다 더 잔혹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그래서 촉법소년의 기준연령을 하향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촉법소년'은 어쩌면 성경적인 용어가 아닐까. 우리가 위에서 본 성경 구절들은 말하자면 촉법소년에 대한 것들이지 않을까.
가만히 양심에 비추어 보면 마음으로든 행동으로든 범죄하기 시작한 아이는 성인으로 보아야 합당한 것 같다. 가끔 우리 주위를 보면 마치 중학생 아이처럼 악의가 없고 순수한 성인들이 있다. 가끔 욕심을 부려서 이상한 생각을 하긴 하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정말 착한 사람들이 있다. 가끔은 세상에 의인이 단 하나도 없다는 성경 말씀이 의하해질 지경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소탈하고, 소소하고, 늘 친절하고, 자기 기분을 내세우지 않고,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는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물론 그들도 악하다.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주기 싫어할 뿐 나머지는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싶어하며, 무엇보다 왜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대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백신을 맞는 일이 공범이 되는 일인지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런 착한(?)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특히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늘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들은 지옥에 갈 텐데 어떡하지, 그들보다 훨씬 악하게 살았던 나는 대체 무슨 염치로 천국엘 갈 수가 있는 거지, 하면서 답답한 아픔을 느낀다.
나는 그럴 때 이 구절들을 떠올린다.
고전7:16 오 아내여, 네가 네 남편을 구원할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 남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7:17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주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대로 그는 걸을지니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같이 규정하노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가 가족이 된, 어찌보면 사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인 배우자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은 얼마나 각별하고 간절할까. 하지만 '일심동체'라고 흔히 말하는 그런 관계에서조차 사도 바울은 '착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내 배우자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하지 말라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께서 부르신 대로 걸으면 그뿐이라고. 나를 지으신,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걸으라고.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나를 낳고 길러주신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이, 태에서부터 나를 지켜보고 수호천사를 붙여 보호해주시고 나뿐 아니라 내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지으신 그분을, 내 죄를 대신하여 가장 수치스럽고 아프고 억울한 죽음을 자처하신 그분을 세상 무엇보다 사랑해야 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그 길을 따라서 걷는 일도 두말할 필요 없이 염치가 있다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내가 그런 분에게 내 욕심을 이뤄달라고 떼를 쓸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이 주제에 관하여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몸소 시범을 보여주고 가셨다. 어렵고 막막한 이 주제를 위대한 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가셨다.
마12:47 그때에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선생님의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기를 바라며 밖에 서 있나이다, 하거늘
마12:48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고
마12:49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
밖에 서 있다고는 하지만 철제 현관문을 쓰지 않았을 당시의 건축양식을 생각하면 여러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말소리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충분히 들렸으리라. 어머니가 듣고 계신데 누가 내 어머니냐니, 유교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불효가 또 있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질서가 아닌 더 큰 하늘의 질서, 사랑만으로 가득한 질서를 깨우쳐주고 계셨다.
그 깨우침은 훗날 드러난다.
요19:2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와 자기가 사랑하던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하시고
요19:27 그 뒤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네 어머니를 보라! 하시니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녀를 자기 집으로 모시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채 죽어가는 와중에 사랑하는 제자에게 내 어머니 마리아가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니라.
육신의 기준에서 보면 마리아는 예수라는 한 사람의 어머니이지만 하늘의 법칙에 따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모두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마리아는 수많은 아들들을 얻게 된 것이다. 그 사랑이 담긴 말씀이 바로 세상 기준으로는 불효에 해당하는 '누가 내 어머니냐?'였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그분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고 내 인생을 버림으로써 얻는 영생의 역설이 효도나 가족간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맛있는 거 사드리고 용돈 많이 드리고 효도여행 시켜드리는 건 작고 미미한 사랑에 불과하다. 진짜 사랑은 부모나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서, 가족을 포기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부모나 가족에게 수많은 가족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오늘 글이 가족의 구원 때문에 고민하는 구독자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자려고 눕기 전에 거의 매일 핸드폰 뮤직앱에 있는 '신약낭독' 라이브러리를 랜덤으로 플레이해놓곤 한다. 오늘의 글에 대해 구상하며 자리에 누우며 랜덤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때 마태복음이 재생되었다. 그리고 오늘 글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80% 이상 잘자리에 들은 마태복음 구절들로 채워졌다. 난 이런 예수님의 소소한 사랑이 참 좋다. 자주 느낄수록 더 좋아진다. 아, 그저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