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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탈락은 있다
    성경 이야기 2023. 6. 25. 15:32

     

     

    지식은 우쭐하게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나에게 직접 깨닫게 해주신 지식을 제외한 남에게서 들은 모든 지식은 우쭐하게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 선지자와 예언가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지식으로 우쭐했던 예가 있었는가.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고 두려워하고 낮아졌다. 하지만 남에게 들어 아는 지식은 두려움이 결여되어 있고 온전한 내 것도 아니므로 사람을 오히려 가볍게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학자들과 건물교회들의 '교리'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남에게서 배운 모든 교리를 잊어야 한다. 그렇게 매번 비워내고 낮은 자세로 읽어야 새것을 가르쳐주신다.

     

    킹 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미국에서부터였다. 기존 교단들의 니골라당적인 모습, 혹은 신사도적이거나 세속적인 모습에 염증을 느낀 많은 기독교인들이 NIV 성경을 버리고 킹 제임스 성경으로 돌아왔다. 선한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변개' 이면에 들어 있는 악한 의도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대주의가 유행하였다. 기존에도 있던 성경 해석들을 존 다비라는 카톨릭 묻은 인물이 집대성했다. 그러더니 현대에 와서 세대주의는 웬일인지 킹 제임스 성경과 마치 세트메뉴처럼 되어 버렸다. 킹 제임스 하면 세대주의, 세대주의 하면 킹 제임스처럼 되었다.

     

    신학교와 교단의 카르텔에 의해 목사에서 목사로 이어지는, 마치 제사 헌물을 바치듯, 머리에 죄를 전가하듯 하는 안수기도를 통해 니골라당의 죄가 계속해서 대를 잇고 있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양심을 쫓는 기독교인들은 킹 제임스 성경과 세대주의를 내세우는 소위 '독립침례교회'에 열광했다. (나도 킹 제임스 성경이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오류 없는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의 교단들에 비하면 킹 제임스 독립침례교회들은 확실히 성경적인 가르침을 훨씬 많이 선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이 유독 독립침례교회만 가만히 놔뒀을까? 그럴 리 없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기관은 면세 혜택을 받고 있고, 따라서 세무조사를 받지 않는다. 국가별로 종교기관 하나씩만 연결해 놓으면 수수료도 없고 세금도 없는 송금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헌금을 이용하면 돈세탁도 세상에서 제일 쉽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어마어마한 마약과 무기 밀매 자금들이 어떻게 세탁되고 돌아다닐까? 혹시 각국의 교회를 거쳐 스위스 은행으로 가지는 않을까? 게다가 일석이조로 교회를 장악하면 예수 믿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끌 수 있다. 내가 사탄이라면 교회 장악에 올인할 것 같다.

     

    예상대로 많은 독립침례교회에서 가르친 소위 킹 제임스 세대주의 교리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백신접종을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 때문이었다. 일단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마치 구원파처럼. 거기에 짐승의 표는 반드시 교회시대 성도들이 모두 휴거된 이후에 등장한다는 시건방진 확신이 불을 끼얹었다. 반드시, 100%의 확률로 짐승의 표는 휴거 이전에는 코빼기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자신들의 성경 해석 정확도가 100%라는 것이다 .

     

    나는 이런 킹 제임스 세대주의가 카톨릭이 설계한 쥐덫이라고 믿는다. 주저리 주저리 말을 듣지 말고 열매를 보자. 킹 제임스 세대주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사를 맞도록 하는 열매를 맺었다. 접종자 마음 합리화를 위한 교리를 제공했다.

     

    킹 제임스 세대주의 교리의 패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이미 주사를 맞은 기독교인들이 절대로 회개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까지 하고 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데 그깟 주사 좀 맞았다고 꼭 회개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회개야 하면 좋겠지만 필수는 아니다. 안 하더라도 휴거 받는 데는 전혀 지장 없다. 세대주의 교리에 따르면 이게 다 맞는 소리다. 이런 교리는 성경을 찾아볼 것도 없이 이미 양심에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어떤 목사도 양심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내가 양심이 성경에서 '믿음' 만큼이나 중요하며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하겠지. 양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도록 하고 오늘은 킹 제임스 주의자들의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 요한계시록 1:3 -

     

    책의 가장 서두에 해당하는 1장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대한 책이다.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채워진 책이란 뜻이다. 이 점을 마음에 담아두고 읽어나가야 한다.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 곧 네가 본,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1장19-20절 말씀이다.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 그렇다면 일곱 교회의 천사들과 일곱 교회는 지금 (사도 요한 당시) 있는 것들일까 아니면 그 이후에 있을 것들일까? 당연히 둘 다 해당한다. 그럼 앞으로 등장하게 될 일곱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둘 다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세대주의의 첫번째 오류가 있다. 일곱 교회를 단순히 타임라인 상 시대별로 나열해 놓고 앞의 여섯 교회는 전부 지나갔으니 우리와는 관계가 없고 우리는 전부 라오디게아 교회 소속이다, 라고 해석하는 건 상식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맞지 않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풍족한가? 세계 곳곳에서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은 그래도 라오디게아 교회 소속이십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양심이 있다면.

     

    물론 세대주의의 해석도 완전히 틀리다고 보기는 어렵다. 확실히 전체적으로 혹은 평균적으로 보면 시대별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속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성도들을 한 그룹, 한 교회로 묶는다는 건 어불성설임을 우리 양심은 안다.

     

    오히려 문자적으로만 보면 일곱 교회는 '동시에' 각각 다른 곳에 나뉘어 존재하는 교회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이름이 지명들이기 때문이다. 따로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사도 요한의 시대에 각 지명에 따라 존재하는 교회 그룹들을 보면 일곱 교회의 특징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자적인 해석에서 끝내면 안 된다는 것또한 양심으로 알 수 있다. 서울, 대전, 부산, 오사카, 동경에 교회가 있다고 해서 거기 속한 사람들이 모두 풍족하거나, 모두 순교하거나, 모두 간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신 앞의 단독자,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에 의한 것임을 안다면 일곱 교회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산다고 집단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적용되겠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첫번째 교회를 한번 살펴보자. 에베소 교회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있는 이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함을 아노니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네가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내었으며 또 참고 인내하며 내 이름을 위해 수고하고 낙심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조금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네가 어디로부터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네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게 가서 네 등잔대를 그것의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시록 2장의 맨 앞부분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에베소 교회에 해당하는 자들은 행위에 열심이 있고, 수고하고 인내하며,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스스로 사도라 칭하며 속이는 자들을 의심하고 시험해서 걸러낼 수 있는 속이기 힘든 자들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인내하며 수고하고 낙심하지 않는 자들. 하지만 그런 자들일지라도 약간의 책망 받을 구석이 있으니 '첫사랑'을 떠났다는 것이다. (버렸다고 번역했는데 left, 떠났다가 맞다.)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 해서 첫사랑을 떠나게 되었는지 기억해서 회개하라고 하신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자가 속한 등잔대(교회)를 치워버리시겠다고 하신다. (옮기리라가 아니라 remove, 없애버리겠다가 맞다.) 등잔대는 곧 교회인데 등잔대가 없어지면 더이상 교회가 아니게 된다. 즉, 구원이 취소된다고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장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는 점이다.

     

    행위에 열심을 내고 수고하며 낙심하지 않는 자들은 정의감이 충만하며 악을 용납치 않기 마련이다. 또 그런 자들은 강직하고 쉽게 남을 믿지 않아서 가짜 사도들도 잘 가려낸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대개 스스로의 열심에 의존하기 때문에 '첫사랑'을 떠나기 쉽다. 여기서 첫사랑이란 예수님의 사랑, 대속의 십자가에 달린 사랑이다. 나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첫사랑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기 쉬운 자들은 에베소 교회, 행위주의자들이다. 행위에 열심을 내다가 어느 순간 내 노력으로 구원 받았다고 마음 중심으로 믿고 있는 자들. 그래서 열심을 내는 데에 방해되고 권위주의적인 니골라당을 미워하는 자들.

     

    여기 어디 지역적, 시대적으로 해석할 것이 있을까. 차라리 MBTI 비슷한 성격 분류에 가깝다. 행위에 열심을 내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장소에나 있어 왔다. 건물교회를 윤이 나게 청소하는 성도들, 각종 봉사 활동을 쉬지 않고 하는 성도들, 각종 헌금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성도들, 일요일마다 몇 시간씩 운전해서 용한 목사 교회로 '주일성수' 하는 성도들.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첫사랑'의 온전한 힘을 믿지 않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 문장은 모든 교회마다 반복된다. 왜 해당 교회에 속하는 자만 들으면 되지 모든 교회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셨을까. 마치 노래 후렴구처럼 그냥 추임새로 반복되는 문장일까? 성경에 그런 문장이 있을 리 없다. 꼭 필요하니까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이 반복되는 이유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일곱 교회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듣고 네가 어느 교회에 해당하는지를 알라.

     

    일곱 교회는 마지막 때 성도들을 분류하는 카테고리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느 교회에 속하는지 양심은 안다. 특정 건물에 함께 모여 있다고 모두 같은 교회 소속일까? 그럴 수 없다.

     
     
     
     
     
     
     

    다음으로 서머나 교회를 보자.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처음이요 마지막인 이 곧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 네가 장차 당할 그것들 중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들의 환난과 궁핍은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사탄의 회당인 자들에 의한 것이다. 카자리안 아슈케나지들에 의한 것이란 말이다. 그런 서머나 교회는 그러나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마귀가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시험할 것이고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겠지만 죽기까지 신실하면 생명의 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열흘 동안, ten days를 여러 가지로 시중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중 킹 제임스 세대주의 교리에서는 10년이라고 해석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본다. 10은 완전수이다. Ten days, 완전한 날들, 남아 있는 모든 날들 동안, 즉 '죽을 때까지'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말이 이어지는 것이다. 10년 살고 나와서 잘 살면 굳이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다음 문장과의 연결의 유기성이 낮아진다.

     

    이 세상의 라이너들, 지배자들인 카자리안 아슈케나지에 의해 설계된 궁핍과 가난과 각종 환난에 처한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북한의 성도들. 또는 남한에 있으나 지독한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 그 환난은 아마도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너희들아,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저 신실하기만 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 어디 시대적, 지리적인 특성이 들어 있는가. 서머나라는 지명 빼면 아무것도 없다. 에베소 교회가 개인의 성품으로 특정한 신앙 형태를 가진 자들에 대한 MBTI 같은 분류였다면 서머나는 보다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환난과 궁핍 아래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가 지금 이 시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가?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대답은 양심이 해줄 것이다.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 있을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베소 교회에 속하는 자들은 행위구원으로 기울어 첫사랑에 대한 믿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여 회개할 것이며, 행위에 열심을 내려고 해도 낼 여건조차 되지 않는 서머나 교회에 속한 자들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죽기까지 신실하기만 하라. 분류와 처방이 명확하다 .

     
     

    그럼 다른 교회들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지면상 건너뛰어 대망의 사데 교회를 함께 보도록 하자.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 깨어서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을 강하게 하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가 완전함을 찾아내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런즉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르리니 내가 어느 시각에 네게 이를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들이니라.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 성도들은 어떤 '행위'로 인하여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즉 명목상은 살아 있는 듯하나 죽었다. 그들에겐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이 있다. 깨어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강하게 하라. 이는 네 행위의 완전하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니, 네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를 것이다. 하지만 사데 교회에도 '자기 의복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있으니 그들은 흰 옷을 입을 것이다. 흰옷을 입은 자들은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사데 교회 성도들은 어떤 잘못된 행위로 인해 죽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잘못은 '자기 옷'을 더럽히는 행위라는 걸 문맥상 알 수 있다. 의복을 더럽힌 자들은 죽어가는 중이지만 아직 죽지 않고 남아 있되 죽으려 하는 것들이 있다. 이 남아 있는 부분을 강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여야 한다. 즉, 의복을 더럽히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해서 받았고 듣게 되었는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게 받고 들은 것을 기억해서 굳게 붙잡고 회개해야만 한다. 회개한 자들은 고작 몇몇 (a few)일 것이고 그들은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이름으로 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걷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 옷'이란 무엇일까. 평소에 옷을 더럽게 입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의복이란 육신을 말한다. 그럼 의복, 즉 육신을 더럽히는 행위란 무엇을 말할까?

     

    앞서 말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대한 책이란 점을 기억하자. 마지막 때 육신을 더럽히는 행위. 간음? 문신? 피어싱? 아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든 사람의 양심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아서 차마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기 힘든 그것이다. 그 주사밖에 없다.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정말이지 떨리도록 무서운 말이 떡하니 이렇게 적혀 있다. 분명히 생명책에 써 있었으나 지워지는 이름들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워지는 이름들은 의복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고 그 잘못을 받고 들었음에도 기억하거나 붙들지 않고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명확할 수가 없다. 그냥 문맥을 잘 파악해가며 읽기만 하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내용이기에 더 두렵다.

     

    생각을 해보자. 일곱 교회에 주어진 말씀들은 그야말로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다. 교회란 거듭난 사람들, 즉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의 모임이다. 건물교회를 평생 열심히 다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전혀 해당이 없다. 더구나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말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말이다. 이래도 구원에 탈락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

     

    킹 제임스 주의자들은 사데 교회는 이미 예전에 지나갔으며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교회라고 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분명 그들이 말하는 '교회시대'에 속할 텐데 어떻게 구원에 탈락이 없다고 말하고 한번 구원은 무조건 영원하다고 말할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사데 교회는 시대적 혹은 지리적으로 특정된 교회가 아니다. 사데 교회는 그 주사를 맞은 지금 우리 주위의 구원 받은 자들을 말한다.

     
     
     
     
     

    다음은 그 유명한 필라델피아 교회를 보자.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니 그가 열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그가 닫으면 아무도 열지 못하느니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지 못하리라. 네가 적은 힘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 곧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보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경배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그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관(冠)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또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고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필라델피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행위를 했고 주님이 그걸 아신다. 그래서 주님은 필라델피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 아무도 닫지 못하는 열린 문을. 그것은 필라델피아 교회에 속하는 자들이 적은 힘을 가지고도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행위를 언급하고 바로 이어서 카자리안 아슈케나지를 언급한다.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행위는 거짓말 하는 카자리안 아슈케나지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괜히 바로 이어서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 필라델피아 교회의 발 앞에 아슈케나지들은 경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교회에 속한 자들은 '시험의 시간'도 면하게 되는데 앞으로 온 땅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온 땅'에 한꺼번에 임하므로 대환란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휴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행위를 한 자들은 필라델피아 교회이고, 필라델피아 교회 앞에는 휴거까지 쭉 열린 문이 놓여졌다. 여기서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의복을 더럽히는 행위'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마지막 때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정도로 중한 죄가 의복을 더럽히는 행위였다면, 휴거까지 쭉 열린 문을 얻게 될 행위 또한 그것이거나 최소한 그것과 밀접하지 않을까. 인간의 유전자에는 디자이너인 주님의 이름이 서명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곰팡이는 유전자를 변형시킨다. 주님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서명을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넣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킹 제임스 주의자들이 오늘날의 교회라고 말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풍요 속에서 뜨뜻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스스로의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만 있을까? 혹시 과거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더라도 그 사람들은 시대적인 이유로 해서 필라델피아 교회에 속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양심은 증언한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구원의 탈락이 암시되어 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내리니'를 구원 탈락과 관련이 없다고 보는 킹 제임스 주의자들은 대체 어떻게 해석을 하는 걸까. 입에서는 토해냈지만 다시 손바닥으로 받았지롱, 이렇게 해석을 하는 걸까?

     

    물론 킹 제임스 주의자들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의 근거로 삼는 여러 구절들이 존재함을 안다. 하지만 애초에 양심이 있었다면 성경의 모든 구절을 참으로 만드는 해석을 교리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성경의 모든 것에는 '예외'라는 걸 두신다는 것또한 알면서도 보고 싶은 구절만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은 '남 얘기'로 치부한다면 그건 '나만 아니면 돼' 무릎팍 도사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양심이 없으면 해석이 열리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내일은 양심이란 무엇이며 성경은 양심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써볼 생각이다. 부디 사데 교회에 속하는 많은 성도분들이 회개를 통해 다시 흰옷을 입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출처: 스카이트리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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